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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회 전국만해백일장 만해대상 작품(제목:시체의 이름으로/글제: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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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한불청지기 작성일21-10-19 11:14 조회2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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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의 이름으로

 

박영주

고양예술고등학교 2학년

 

 

가짜 피에서는 딸기향이 났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 지 스태프들은 오로지 컨테이너의 미관만을 신경 쓰며 연신 가짜 피를 덧바르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서서 피 묻은 원피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엉킨 머리의 통증이 두피에서부터 조금씩 전해져왔다.

슛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지하 세트장에서 서성거리자 한 스태프가 익숙하다는 듯이 안내를 해 주었다. 헤드폰에 이름표, 손목 아대까지 야무지게 찬 그녀는 언뜻 봐도 신입 같았지만, 대개 활기찬 신입 스태프들과는 다르게 당장이라도 그만 두고 싶은 표정이었다. 나는 시체 역할 대기실이라고 쓰인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무수한 시선과 동시에 인조적인 딸기 내음이 훅 끼쳐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시체 역할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곳은 귀신의 집을 연상시켰다. 얼굴에 온갖 분장을 한 채 저만치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는 아이들은 강시 같았고, 널찍한 거울 앞에 둘러 모여 서로의 머리칼을 반대로 빗어주는 사람들은 꼭 처녀귀신 같았다. 내 또래로 보이는 사람이 누구인지 좀처럼 알아볼 수 없어, 나는 문 옆의 구석으로 가 조용히 앉았다.

드라마의 단역을 전전하며 알바로 삼던 중, 과선배에게서 시체 역할의 페이가 쏠쏠하다는 얘기를 듣고선 바로 알바를 지원했다. 헌데 이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알고 온 것일까. 나처럼 오직 돈만 보고 왔다기엔 어린 아이들도 꽤 있었다.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 강시들에 시선을 두고 있자, 그 근처에서 누군가가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짙은 분장으로 인해 도무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그쪽으로 다가갔다. 언제부턴가 딸기향이 나지 않았다.

손짓을 건넨 사람에게로 다가가니, 그들은 빙 둘러 앉은 저들의 자리 사이에 내가 앉을 공간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그들 중 누가 손짓을 한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나는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내 옆자리의 여자가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녀는 나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얼굴을 메운 피 분장 사이로 기대에 가득 찬 눈들이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대에 비해 내 사유는 너무도 보잘 것 없었다. 대충 망설이며 질문을 피하려 했으나 내 대답 전까지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을 기세였다. 결국 나는 배우 지망생이라고 조그맣게 말했다. 이게 무슨 터무니없는 대답인가. 바보 같은 대답을 한 것이 부끄러워, 나는 서둘러 질문의 대상을 돌렸다.

마땅히 지목할 사람이 없어 나는 내 바로 맞은편에 앉은 할머니로 보이는 여자에게 물었다. 왜 여기에 오셨어요? 여자는 빙긋이 웃으며 침을 삼켰다.

시체가 되고 싶었어요.”

순간, 일동 적막이 흘렀다. 여자는 천천히 말했다.

별 일은 아니고, 딸 내외가 마트에 다녀오겠다며 잠시 나를 차에 두고 간 적이 있었어요. 그땐 금방 오겠다 싶어 오줌을 꾹 참고 있었죠. 근데 시간이 갈수록 얘들은 안 오고, 오줌은 쌀 거 같은 거예요. 못 참겠다 싶어 차 문을 열었더니 차가 막 짖었어요. 개 같이, 나를 향해서 깜빡깜빡 짖었어요. 그때 참 죽고 싶더라고요.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는데, 그 어두운 주차장에서 나만 깜빡깜빡.”

여자는 말을 멈추었다. 나는 그 광경을 머리에 그려보았다. 맹렬히 짖는 차 옆에 우두커니 선 노인. 한동안 사람들이 조용했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여자는 또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 여자 옆에 앉은 또 다른 여자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할 준비를 했다. 그녀의 왼손에 들린 손수건에 빨간 가짜 피가 조금 묻어나왔다.

저번 주에 지하철역에서 누가 아줌마! 하고 부르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어요. 사실은 날 부르는 게 아니었죠. 너무 창피에서 홱, 몸을 돌렸는데 갑자기 오만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줌마라고 하면 왠지 지하철 자리에 가방 던져놓고 자리 잡으려 막 뛰어가는 사람이 생각나고. 누구 엄마, 누구 엄마, 불리다가 이젠 아줌마가 되었구나, 생각했어요. 이름 없이 살아보고 싶었어요. 그 어느 것으로도 불리고 싶지 않았어요.”

여자가 말을 마치자 몇몇 여자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상황도 머리에 그려보았다. 어쩐지 마음이 고요해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스태프가 우리를 불렀고, 우리는 감독의 지시에 따라 차례로 컨테이너 안에 자리를 잡았다.

배우님들 변신 아시죠, 변신? 나는 지금 죽었다, 생각하시고 가만히 움직이지 않으시면 돼요.”

감독이 말했다. 컨테이너 내부에 희미한 기운이 흘렀다. 어린 애들은 컨테이너 입구 쪽에 포개어져 있었고, 나는 시체가 되고 싶었다던 할머니와 머리를 맞대고 누워 있었다. 컨테이너의 천장은 시꺼맸다. 조금 전까지 대기실에서 나누었던 말들이 이곳에서는 흩어지고 없었다. 우리는 컨테이너 내부를 부유하는 진한 딸기향에 취한 채 시체로 변해 있었다.

눈을 감으라는 감독의 지시가 들려왔다. 소란하던 가슴이 진정되자 옆에 누운 여자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새근새근한 소리의, 어쩐지 설레는 듯한 숨이었다. 이곳에서 우리에게 붙은 수식어는 없었다. 우리는 그저 시체의 이름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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