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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야심경 ] 육바라밀1 - 보시바라밀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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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9-11-16 13:59 조회4,462회 댓글0건

본문

Ⅰ. 반야심경의 개관
Ⅱ. 경의 제목
Ⅲ. 경의 실천적 해설

1장. 반야심경의 구성방식
2장. 관자재(觀自在)
3장. 보살(菩薩)
4장.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

5장. 육바라밀(六波羅蜜)
(1)보시바라밀 수행


‘바라밀’이라고 하면,
우리는 쉽게 ‘육바라밀’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육바라밀이란
보살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하여
수행하고 닦아 가는 여섯 가지 실천 수행방법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저 언덕에 도달하는,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한
여섯 가지의 주요한 수행 방법인 것입니다.

그럼 반야심경의 다음 부분을 살펴보기에 앞서
육바라밀에 대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보시바라밀 수행

보시(布施)란, ‘베풀라’는 것입니다.
베풂의 수행을 통해서
괴로움의 이 언덕에서 피안의 저 언덕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보시바라밀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베품과 보시바라밀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베품이라는 것은 그저 남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의미이므로,
여기에는 보답을 바라거나,
과보(果報)를 바라는 마음이 남을 수 있습니다.
베풀기 싫은데 억지로 베풀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보시바라밀은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상이 남아있지 않은
맑고 청정한 베품, 즉 무주상보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주상보시란 상(相)에 머물지 않고 하는 보시를 말합니다.
즉 보시를 하고 ‘내가 했다’ 라는 상이 남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
다.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도왔다고 하는 상이 남아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그가 나에게 돌려 갚기를 바라게 되고,
혹은 머릿속에라도 기억해두고는
이후에 갚아지지 않으면 서운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상에 머물러 보시를 하게 되면
그대로 ‘내가 했으니 언젠가 받겠지’ 하는 마음 때문에
다음의 어느 때, 혹은 다음 생, 그 다음 생에까지 쫒아가서
그 빚진 마음을 꼭 돌려 받기를 원하고,
그 마음이 굳어져 업이 되어 윤회하는 원동력이 되므로
결국에 그 상 때문에 윤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주상보시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올바른 자각이 있을 때 자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실천의 행입니다.
본래 너와 나라는 분별이 없으니
어디에 네것, 내것이 있겠으며 가고 옴이 있겠습니까?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올바른 자각의 지혜가 생겨나면
동체대비심의 대자비심이 우러나오기 마련이고
서로가 둘이 아니라는 이 자각은
곧바로 무주상보시라는 실천행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무주상보시는 베풀었다는 상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어떤 보답이나 과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에 했을 뿐인 것입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에, 주관과 객관이, 주는자와 받는자가
둘이 아니기에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상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니 밥 먹고, 갈증이 나니 물 마시는 것처럼,
배 고픈 사람 있으니 공양하고, 갈증나는 사람 있으니 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내가 내게 하듯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함이 없이 하는 것이 보시바라밀의 참 의미일 것입니다.

내가 필요해 스스로 옷을 사 입거나, 배고파 음식을 먹는다고 했을 때,
내가 나에게 보시했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내가 옷 입히고 먹였으니 내가 내게 과보를 받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이웃의 어려움이 바로 나의 어려움과 둘이 아니라는
연기의 도리를 알기에, 당연히 나에게 하듯이 베푸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시바라밀은 단순하게 베푼면 되는 일이 아닌,
지혜가 밝아졌을 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반대로 자꾸만 베풀고 베풀어 보시바라밀의 씨앗을 심어 놓으면
보시바라밀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어 지혜를 밝힐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보시바라밀은 그저 복 짓는 일이 아닌
지혜를 밝히는 깨달음의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보시바라밀의 실천은
‘내 것이다’라는 아상(我相)을 타파하는 방하착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
다.
보살에게는 ‘나다, 남이다’ 하고 나누는 분별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괴로우면 보살도 괴롭기 마련인 것이지요.

중생이 모두 성불하는 날이 바로 보살이 성불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보살에게,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내 맘대로
한다’ 라고 하는
아상(我相)이 모두 비워졌기 때문입니다.
보살에게 있어 ‘나’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
일체 중생과 둘이 아닌 존재로서의 ‘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살은 베풀어도 베푼 대상과 베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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